彌勒寺)에서 실시된 경우도 있었다.
나) 숙종 6년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의종 19년 및 명종 22년에는 지칭(智偁)이, 명종 10년에는 정각승통(正覺僧統)이 고시관을 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시관은 각 종파의 고승이 겸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나 무신집권 이후에는 간혹 유학을 닦은 과거급제자도
타당한 설은 익산(益山) 미륵사(彌勒寺)의 연기(緣起) 설화로서, 백제의 멸망 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
Ⅱ. 서동요(신라의 향가)의 원문과 해독
1. 원문
薯童謠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
彌勒寺 등 모두 25곳에 이른다. 이 수는 [표]에 작성된 고려전기 개경에 창건된 주요 절의 2/3에 해당될 정도로 많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태조대 창건된 절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경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궁궐주변과 송악산록에 위치하였다는 점이다. 이곳은 5부방리로는 북부에 해당된다. 특히
彌勒寺),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 등의 사찰이 세워졌던 백제사회에는 彌勒信仰이 유행하고 있었다. AD634년에 낙 성된 미륵사는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 사원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던 백제 왕실의 원찰이기도 했다. 이 절의 창건연기설화에서 용화산(龍華山)아래의 못에서 미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백제 두 나라의 관계로 보아 이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설이 있다. 가장 타당한 설은 익산(益山) 미륵사(彌勒寺)의 연기(緣起) 설화로서, 백제의 멸망 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