濊貊族)으로 보고, 한서 상층문화는 부여족(夫餘族)의 문화라고 보고 있다. (陣相偉 李殿福 主編(1982), 《大安縣文物志, 吉林省文物志編委會, pp.25-30) 혹자는 한서문화 대신 백금보 문화를 부여족의 선세(先世)인 예맥족의 분화로 보기도 한다. (孫秀仁(1979), <黑龍江歷史考古述論>(上),《社會科學戰線》 1
濊貊 扶餘와 高句麗의 正體性’ 문제의 초점은 예맥에서 비롯한 부여와 고구려의 동질성 확인에 있다.
Ⅱ. 文獻에 나타난 濊貊
1. ‘東夷’ ‘Altai語族’
1) ‘東夷’
우리민족문화의 바탕을 底礎하였던 청동기문화가 中原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하동서설 자체가 중국
濊貊)땅이던 이 지역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흡수되었으며, 신리 진흥왕이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신라 말기에 후고구려 땅이 되었다. 그러나 918년 고려가 건국을 하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었고, 995년(성종 14년) 전국을 10도로 구획할 때 삭방도(朔方道)가 되었다. 그 후 연해
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개본예맥지지, 이부여왕기중,
아마도 본래 예맥의 땅이었는데, 그런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진수(陳壽), 「동이전-부여」,『삼국지』, 중국 진(晉) 나라 초기.
時句麗·鮮卑彊, 度 以夫餘在 二虜之間, 妻以宗女.
시구려·선비강, 탁 이부여재 이로지간,
, 점복, 예조, 금기, 주술, 풍수지리, 민간의료 등의 신앙이 있다.
우리의 민간신앙에 관한 것으로 처음은 {한서} 및 {후한서}의 <동이전>에서 언급된 제천행사 곧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등이다. 특히 거기에는 예맥(濊貊) 사람들의 의례와 풍속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