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정( 庭) 김려(金 , 1766∼1821)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조선은 중세적 제관계과 급속히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활발히 모색되던 시기였다. 민중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이 점차 거세어지는 추세에 있었고, 집권 양반계급 내부의 권력투쟁 또한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현실의 낡
계속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죄가 되어 2년 후인 1638년에는 1년간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해배(解配)된 후 해남에서 은거하던 중에 고산은 금쇄동(金鎖洞)이란 곳을 발견한다. 이후 약 17년간 고산은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오가며 은거를 한다.
解配期)의 4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의 한 평생을 돌아보면 유난히 격변과 위기의 여울목이 많았으니, 그가 격심하게 부딪혀 돌아서 가야했던 고비들을 좀 더 세분하여 본다면 아래와 같이 7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서술의 편의를 위해 (나) 사환기의 두 단계와 (다) 유배기의 두 단계를
통해 조선 후기 변방민중의 생활현실을 폭 넓고 깊게 그려내고 있다. 그 외에도『장원경 처 심씨를 위해 지은 시』『감담일기(坎窞日記)』『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등이 있다. 1806년 유배생활이 끝났으며 해배(解配)이후 김려는『담정총서』17책 34권을 편찬, 야사집(野史集) 편찬에 몰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