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연은 처형되었다.
이 일어나 정부는 공식으로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을 내리게 되었고, 서학서적에 대한 금서령(禁書令)이 내려졌다. 진산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그 자신이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함을 분명히 지적했고 그가 27세-29세 사이에 천주교 신앙을 떠났음을 암시했다.
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1836년 2월 22일 고향 마현(馬峴)의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자신의 저작물을 수록하였다.
Ⅱ. 다산정약용의 정치사상
다산의 정치사상은 다산의 독창적인 사상이었다기 보다는 광범위한 지식 대중들의 생각을 그가 집대성한 것이라
다산정약용은 시를 道와 志 위주의 궁극적인 합일론 즉, 지적이고 경험적인 성숙이 달성된 고도의 경지에서 훌륭한 문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시란 뜻을 말하는 것이니, 마음에 품은 바 뜻이 본디 낮으면 맑고 고상한 말로 억지로 만든다 해도 이치를 이루지 못하며, 뜻이 본디 고루
일삼는 폐단에 빠져 있었다. 특히 임진 · 병자의 양란 이후 사회 · 경제적 질서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도 개국이래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된 주자학은 피폐된 사회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죄없는 백성들을 산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
나. 실학의 형성시기와 특성
실학은 사회적 혼란기에 통
정약용은 민(民)의 개념을 이전과 달리 해석하였고, 이 새로운 사상을 「탕론(蕩論)」과 「원목(原牧)」 등을 통해 역설하는 한편, 「목민심서」라는 역작으로 구체화시켰다. 정약용은 「원목」에서 통치자의 발생 연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옛날에야 백성만이 있었을 뿐, 어찌 백성을 다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