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한자가 창제된 이후에도 문자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즉, 구어는 우리말이었으며 문어는 여전히 한자로 존속하였다. 특히, 상위계층인 사대부들은 한글을 천시하고 한문을 높이 평가하여 한자생활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이들의 이러한 가치관과 문화가 반영된 것이 바로 한문학이
金宗直)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
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생
金宗直, 1431년-1492년)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계속해서 24세에 선산향교에 점필재를 찾아 출입하면서 문인들과 더불어 경서를 토론하였다.
김굉필은 성종 11년 27세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41세에 당시 경상 감사 이극균의 천거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사헌부 감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