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牧隱) 이색(李穡)역시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다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시련을 겪었다.
(1) 여말 시대상황과 이색의 입장
이색은 고려와 원의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한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격려를 받으며 공부에 전념
문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창의 문학 가운데 신라의 것은 향찰이라는 기록의 수단을 얻어 향가로 남게 된 것이며 고구려나 백제에도 이와 유사한 양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육조말기에 이르면 이제 시가 가와 점차 분화되기 시작하고 음악성이 배제된 문선이 우
시대를 가리켜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그 문화적 역량을 더욱 키워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골품제라는 신분제도의 모순 심화, 토지 소유의 집중, 그리고 왕위를 둘러싼 귀족간의 갈등 격화 등 체제를 위협하는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문학론으로 정착되니까 지는 精深한 사려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도 書經으로부터 魏文帝의 단편적인 언급(典論)을 거쳐,梁의 유협(文心調龍)과 周榮(詩品)에게서 초기 비평형태를 접하게 되었다가, 宋代 歐陽脩의 六一詩話 이후로 비평문학의 울흥을 보게 된다. 우리의 역시 고전
고려시대의 문학을 가리켜 흔히 위축시대, 공백시대 또는 암흑시대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러한 표현과 평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그때까지 고유문자가 아직 없어 국문작품이 전해질 수 없었고 또 한문학의 발전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한문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