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을 동시에 배격하였다. 이들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었으며 변호했다. 프린스톤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서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통일과 평화를 갈구하는 열망은 광교회주의에 대한 경향으로 나타난 신학적 다원주의,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근대주의적 무관심, 보수세력의 쇠퇴로 나아갔다.
프린스톤신학 전통의 마지막 주자 메이천은 1920년대와 1930년대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에서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보수 연합세력의 결집인 근본주의 운동 지도자로 논쟁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으로 1812년 프린스톤신학교의 설립부터 1929년 이사회가 재편성되어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하여 남침례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이런 신학은 당시 선교사들의 영향이 젊은 박형룡의 혈맥에 깊이 자리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사상을 살피기 위해서는 당시 프린스톤신학교와 그 신학교가 속한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신학전통을 살펴보는
교회와 사회의 질적인 구별을 부인하는 소위 신 만인구원론을 내세운다. 이러한 현재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교회론은 한국의 전통적인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 전반에 대한 도전이며, 특히 청교도적 보수신학을 지향해 온 한국 장로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서는 그러한
교회와 사회의 질적인 구별을 부인하는 소위 신 만인구원론을 내세운다. 이러한 현재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교회론은 한국의 전통적인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 전반에 대한 도전이며, 특히 청교도적 보수신학을 지향해 온 한국 장로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서는 그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