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초창기의 호감과는 달리,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학문적 비판 비판의 내용은 대부분 양명학이 불교의 선종에 가깝기 때문에 유학의 정통을 이은 것이 아니며, 특히 인간의 도덕성을 부정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
양명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남언경과 그의 문인인 이요, 그리고 이 두사람의 뒤를 잇는 허균과 최명길, 장유 등이었다. 이렇게 조선 양명학은 사상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주자학 세력의 지속적인 견제속에서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하곡정제두에 이르러 마침내 대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수정파(修正派)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
양명학 신봉자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있으나 본격적으로 양명을 연구하고 수용한 것 같지는 않다. 교산 허균은 그의 사상과 문학작품에서 양명좌파에 속하는 이탁오의 <동심설>의 영향을 많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하겠다. 남언경과 최명길, 정제두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학자는 장유인데 그는
양명학, 탈주자적 경전 해석 등 반주자학적 유학 사상이 등장
2> 백호 윤휴(白湖 尹鑴)와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의 탈주자적 경전 해석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격렬하게 비판
(2) 백호 윤휴
1> 주자의 경전 해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한나라 시기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