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이다. 원·명교체기는 이민족왕〔원조(元朝)〕를 타도하고 한민족왕조〔명(明)〕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종래 무수히 반복되어 온 왕조교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더욱이 이러한 원명교체의 정치적 의미가 더 한층 중용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원제국지배(元帝國支配)하에서 파괴된 중국문화가
나라 때와는 달리 독자적인 행정권, 조세 징수권을 일체 갖지 못했고, 그 지역의 군사지휘권만을 가졌다.
왕양명의 양명학(陽明學)
1. 새로운 학문의 탄생
명대에 성리학은 더욱 융성하였다. 성리학은 그 자체로 완벽한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스르는 새로운 사상의 출현은 기
명(明)나라를 세웠다. 명나라 태조가 된 주원장은 홍무제(洪武帝)라 불리었는데, 그는 몽고족 밑에서 시든 중국 고유의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는 송나라 때와 같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직결시키는 황제 독재 체제를 택하였다. 우선 재상 제도와 중
명의 조선 사절단이 오간 길이다. 이런 사행을 명나라 때는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뜻의 조천(朝天)이라 했다.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오랑캐를 떠받드는 말을 쓸 수 없다 해서 연행이라고 불렀다. 조선과 중국을 잇는 이 길은 1000년 가까이 이어진 교역과 문명의 통로였다.
공로는 명대에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신유학은 이후 명말의 혼란한 사회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명말에 등장한 진보주의 사상은 명나라 말기 혼란한 사회 위기가 초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당시 등장한 태주학파와 동림학파는 혼란한 사회에 큰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