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의 대표적인 금서(禁書)로는 《수호전(水滸傳)》과 《금병매(金甁梅)》를 들 수 있다. 《수호전》은 ‘관이 압박하면 민이 반항한다’는 민중의 의지와 희망이 반영되고 도둑질을 가르치는 저술이라 하여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왔으며, 《금병매》는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한 외설문학의 대표서로
나라 때와는 달리 독자적인 행정권, 조세 징수권을 일체 갖지 못했고, 그 지역의 군사지휘권만을 가졌다.
왕양명의 양명학(陽明學)
1. 새로운 학문의 탄생
명대에 성리학은 더욱 융성하였다. 성리학은 그 자체로 완벽한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스르는 새로운 사상의 출현은 기
명초의 문단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작가로는 유기(劉基), 송렴(宋濂), 고계(高啓)를 댈 수 있다. 유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읽기를 좋아하여 천문·기상·역법·군사 등의 분야에 정통하였다. 시풍은 질박하고 웅장했으며 산문에도 뛰어나 원나라 말기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한 글을
기개있는 남아로 하여금 웅지를 품게한다.
중국명대의 유학자. 전통적인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한 왕양명의 분파인 급진적인 태주학파(泰州學派)였다. 금욕주의·신분차별을 강요하는 예교(禮敎)를 부정했다. 반(反)유교적인 내용을 설교하여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명의 조선 사절단이 오간 길이다. 이런 사행을 명나라 때는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뜻의 조천(朝天)이라 했다.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는 오랑캐를 떠받드는 말을 쓸 수 없다 해서 연행이라고 불렀다. 조선과 중국을 잇는 이 길은 1000년 가까이 이어진 교역과 문명의 통로였다.
공로는 명대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