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바트는 이러한 허위적인 중산층
작 가 소 개
혹은 소시민의 의식을 속물의식으로 규정한다. 그는 새로운 민중극에
소시민을 집중적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데, 그들은 경제적 면에서는 실제로 프롤레타리아와 별로 다를 바 없으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는 자신이 속한다
연극의 재현되는 사건에 말려들기 보다는 무대의 상연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더 철저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실적으로 1920년대 북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진 독일의 표현주의 연극에서는 독일민중의 계몽과 정치의 선전을 위한 방법으로 출발한 브레히트의 서사 연극이 연극의 기능을 사회적
연극의 발상을 발전시켜, 사회 기구를 비판하는 희곡에 많이 반영시켰다.
192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여,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교육극과 고리키의 작품을 각색한 《어머니 Die Mutter》(1930)와 《도살장의 성(聖) 요한나 Die heilige Johonna der Schlachthöbe》(1932)를 썼다. 1933년
브레히트는 뮌헨 캄머슈필레 극장의 희곡 전문가가 된다. 그는 성악가 마리아네 초프와 결혼하며 이들 사이에서 딸 하네가 태어난다. 이렇게 그의 희곡이 공연되기 시작하며 그는 점차 희곡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결국 1924년 연극을 비롯한 문화 활동이 활발했던 베를린으로 이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