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출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서울 토박이라는 점이다. 천변의 차옥정은 주로 중인계층들이 살고 있었던 곳으로 약국을 비롯하여 다방, 술집, 이발소 등 근대적인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던 지역이다. 중인들은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경직된 사화와 국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대변함
문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법의 적극적 수용으로 표현된다. 박태원의 소설에 의식의 흐름 수법을 처음 시도하고 있는 것은 서구문학의 깊은 관심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박태원이 문단적인 지위를 확고하게 정립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1933년 구인회(九
소설로서의 등단은 1930년‘신생에 단편‘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1933년 구인회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 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구보씨의 1일’ ‘천변풍경’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
소설의 연구범위에서 제외되어왔지만, 탐정소설이나 방송소설의 측면에서 재조명되면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박태원은 영문학과 중국 문학의 작품들을 번역해왔는데, 작가의 번역작업과 번역 양상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넷째, 박태원소설에 나타나는 영화적 기법에 대한 연
문학관을 구축하면서 법정대학을 중퇴하고 얼마 후 귀국길에 오른다. 그리고 귀국 후, 박태원은 곧바로 작품 활동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1년 이상의 침묵의 기간을 지낸 뒤 비로소 본격적으로 문단에 진출하는데, 그것이 바로 <九人會>를 통해서이다.
3. 박태원 그리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구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