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강조한 것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그의 그로테스크 양식은 단순히 상충되는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상충되는 것들 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추구하며, 이 떄 관객은 연극의 제 4의 창조자로서 그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삶의 단순 묘사(reflection)로서의 예술이 아
예술 작품의 유일한 가치"와 그것을 가까이 할 수 없음에서 생긴 자신의 종교적 숭배 가치도 상실하게 된다. 예술 작품의 종교적 숭배 가치는 바로 전통적 예술 작품이 자신의 권위로서 가지고 있었던 예술 그 자체의 몰락이란 벤야민에게 있어서 예술 그 자체의 몰락이 아니라 전통적 예술 작품이 가지
사이에 사람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다. 거울 앞에서 원판을 돌리며 구멍을 들여다보면 각각의 단계는 마치 연속된 움직임처럼 보인다. 구멍을 뚫은 원판은 위가 뚫린 회전 원통으로 발전하였다. 움푹 낮은 안쪽 면을 따라 그림띠가 둘러져 있고 수직의 틈새로 들여다
예술에 투입되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으로 치장되어 있는 예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걸러내지 못한 채 대중들은 환상에 빠져 넋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와 미국 중심 세계화의 이데올로기 아우라를 표출하고 있는 최근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벤야민이 말하는 미메시스 능력은 모든 심성능력에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메시스는 예술에 대한 벤야민의 개념을 지탱해주는 것이기도 한데, 특히 원작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권위나 진위성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에서의 '아우라'개념과는 서로 상보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벤야민은 미메시스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