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은주(殷周) 문명이 발달하였다.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붓다가 활약하였던 기원전 5, 4세기 경에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였고 공자나 노자를 비롯한 많은 사상사들이 출현하였던 시대였다.
이 두 개의 단절되었던 문화가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말 중앙아시아를 횡단할 수 있는
중국사 전반에서 나타나는 불교와 국가간의 일반적인 관계를 살펴보고 동진(東晋)시대 여산 혜원(廬山 慧遠, 334 ∼ 416)의 『沙門不敬王者論』을 중심으로 당시 이를 둘러싼 논쟁과 이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불교교단과 정치권력의 관계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중국 역사상의 국가권력과 중국
중국의 불교가 국가불교적 성격을 띄게 된 것은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권력자나 지배자에 의한 보호와 지지가 없으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중국의 불교가 일반적으로 가장 절정에 달했던 당조(唐朝)의 불교를 살펴보면 정치권력이 불교에 대해
불교교단은 이러한 정법을 보호하고 전승하는 자인 데 비해 국가는 법을 운용하는 주체였다. 불교교단은 의연히 국가권력에 대해 주체성을 고수하면서 불교교단은 세속권력보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였으며, 치외법권의 특혜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세속의 국왕권이 차츰 전제화 하면서 불교는 국왕의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국보 제 78호와 83호의 비교와 함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만들어 지기까지의 배경으로 미륵보살에 대해 알아보았다.
◎ 반가사유상
불교가 삼국의 대중적 신앙으로 발돋움한 7세기에는 중국의 유행과 관련이 없는 독자적인 불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