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황룡사 일화와 마찬가지로 신라불교가 민간 신앙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신앙 혹은 신라불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융합했음을 보여준다.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은 사람도 원광이다.
또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란 자는 사량부(沙梁
3. 삼국유사에 드러난 불교의 대중화
3.1. 승려들의 교화 활동
3.1.1. 혜공 (三國遺事, 二惠同塵)
- 釋惠空天眞公之家傭嫗之子小名憂助(석혜공천진공지가용구지자소명우조)
: 승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였다.
- 常住一小寺(
불교를 종합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정토신앙을 널리 전파하고 또 어려운 불교 이론들을 민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래를 지어 전파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에 의해서 신라의 불교는 민중이 수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불교가 널리 대중
상대적으로 산이 없는 서쪽은 가볍기 때문에 불안정하다고 본 것이다. 그 가벼운 지세를 누르기 위해 서쪽의 화순에 운주사를 세우고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셋째, 평지 가람이 없어지고 산지 가람이 많게 된 것은 조선시대의 억불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 불교의 대중화
(6) 근ㆍ현대의 불교
조선조 500년간 억압을 받았던 불교계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또 위축되었다. 개항이 이루어진 다음 해인 1877년부터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일본 각 종파의 승려들은 국내 곳곳에 포교당과 사찰을 건립하고 국내의 승려들을 포섭 또는 개종시키기 위해 온갖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