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은 동양의 정치 지배자들과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서양인들이 몰고 온 증기선과 거기에 비치된 대포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19세기 조선사회는 18세기와는 달리 격심한 내적 동요까지 겹쳐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8세기 조선사회는 영조․정조 등의 현군들이 있어 신하들의 붕
상황에서 새로 다가온 서양문명에 대한 대응은 결코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세도정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부친이 대원군의 직함으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마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 정비를 우선한 나머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1880년 고종은 드디어
상황에서 새로 다가온 서양문명에 대한 대응은 결코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세도정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부친이 대원군의 직함으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마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 정비를 우선한 나머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1880년 고종은 드디어
서양사상의 특징이 ‘자연 대립적’이라면 동양사상의 특징은 ‘자연친화적’이라고 평가하는 박이문은 동양적 세계관에서 생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서양문명의 정신적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원론적 형이상학, 인간중심주의, 자연 대립적 태도, 이성 중심적 분석적 사
서양문명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게 되고 조선사회도 격심한 내적 동요가 겹쳐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내적동요는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다 그러나 내적정비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대외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