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사] 고종황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화 초기에서의 고종.
2. 고종의 대한 암약설(暗弱說)
2.1서양인들의 평가
2.2. 고종 황제에 대한 암군설․암약설에 대한 반론
3. 고종의 신도서 구입사업
4. 최초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
5. 마치며
본문내용
1. 개화 초기에서의 고종.
19세기 조선사회는 18세기와는 달리 격심한 내적 동요까지 겹쳐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18세기 조선사회는 영조․정조 등의 현군들이 성군절대주의를 표방한 가운데 신하들의 붕당 대립을 억제하면서 민의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민국(民國)정치 이념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군주들이 계속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 것을 틈타 수구세력이 집단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왕권을 무력화시키기에 이르렀다. 흔히 세도정치로 불리는 이 정치행태는 민에 대한 일방적 수탈로 민란의 광범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사회적 혼란을 극도로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다가온 서양문명에 대한 대응은 결코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세도정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부친이 대원군의 직함으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마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 정비를 우선한 나머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1880년 고종은 드디어 개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개화 실상을 확인하고, 개화를 주도할 관서인 통리기무아문을 신설했다. 1881년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 중국에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여 신문물 수용을 위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이 무렵 고종은 중국으로부터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문물 소개서들을 포함해 3천여 종 4만여 책의 중국서적들을 사들였다. 이태진, 『민족문화논총』, 영남대, 1996.
심지어 각국 간에 체결된 조약들, 영국․일본 등이 한반도 연안을 측량한 지도들까지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바깥 세상에 대한 일종의 정보수집 행위였다.
고종은 원활한 개화 정책의 수행을 위해 1883년부터 정부기관지로서 『한성순보(漢城旬報)』『한성주보(漢城周報)』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두 신문은 종래 ‘온건 개화파’ 또는 ‘민씨척족정권’의 개화정책의 산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잘못된 인식의 결과였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은 ‘병합’전후부터
참고문헌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 2000.
이태진, 「고종황제 암약설 비판」『東北亞』5, 1997.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근대사강의』. 한울.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