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접촉을 매우 제한시켰으며, 네델란드인과 중국인들이 제공하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정보도 통제하였다.
쇄국은 처음 100여년 정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 후 서양지식에 대한 적대감은 호기심이 의심을 압도하고 반기독교 감정도 시간이 지나 무디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검열이 결코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지식인에게 전통적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또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과정, 그리고 그들이 받았던 박해와 그 영향들을 살펴보자.
2. 서학(천주교)의 수용
과학기술로, 그리고 근대 과학사도 19세기 일본 개국을 기점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6세기 이전까지인 제1기에는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고대 과학기술이 자리 잡았으며, 제2기인 17세기 이후에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던 서양 문명을 진취적으로 수용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인 제3기에 일본은
서양문물과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관계 서적과 천주교 교리서 등이 들어왔는데, 이를 서학이라고 함. 서학은 처음에는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서양학문의 일부로써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음.
3) 서양문물의 전래
=> 중국에 파견된 사신들이 중국의 북경에 머물던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전래
Ⅰ. 서 론
한중일 삼국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서양세력에 의하여 개항되어 본격적인 근대국가의 초석을 만들게 되었다. 그때 당시 가장 먼저 개방한 나라가 일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과 중국은 개방에 소극적이어서 선진과학기술을 먼저 받아드린 일본에의 속국이 한국의 경우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