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은 16세기의 말과 17세기의 초에 성행한 예학(禮學)과 더불어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었다. 주리론과 주기론의 표면적 논쟁은 없었으나 명분과 형식을 더 강조하는 쪽과 실질과 효용을 함께 중시하는 쪽의 대립은 가끔 있었던 일이다. 본래 고전 유학에서의 예는 내면적 인의(仁義)가 외현적으로 표
성리학을 구성-발전시켰다. 이러한 성리학은 기존의 중국문화가 갖고 있는 다양한 성격들을 유교를 중심으로 재통합함으로써 정치적 통일, 문화적 결속, 사회적 안정을 기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성리학은 남송대에 주자에 의해 집대성되는 것을 계기로 유가의 학문에서 천하의 학문으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고 기호지방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등이 있다.
3)훈구파와 사림파의 성리학의 성격비교
훈구파는 성균관과 같은 관학에서 사장학(시와 문장) 중심의 공부를 한 반면, 사림파는 서원과 같은 사학
성리학 교육의 목적은 선인 양성(최종목적은 성현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교육내용은 소학,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이며 교육방법은 성현의 행실 모방하는 것이다. 숭배대상으로는 공자, 맹자, 정자, 주자가 있으며 실천요목은 孝, 悌, 忠, 信, 禮, 義, 廉, 恥가 있다.
성리학 교육의 의의는 첫째, 인
영남 지방의 문화가 꽃피고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더군다나 신라시대부터 전파된 불교문화와 조선시대에 들어 영남지방에 기반을 잡고 학풍을 만들어간 사림세력에 의해 영남 지방의 문화는 더욱 풍부해졌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중국의 주자학을 발전시켜 조선성리학을 완성시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