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시기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이것이 중국 宋에서 발흥할 무렵, 즉 고려 仁宗(인종)대를 전후한 시기(11~12세기)부터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빈번하게 수집해 들였고, 외교경로를 통해서 윤언이와 같은 대학자가 송에
Ⅰ. 성리학(주자학)의 성격
조선의 성리학은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계승하여 전개되어 가는데 퇴계의 이기불상잡의 강조, 사단칠정의 이기호발이라는 입장과 율곡의 이기혼륜무간 사단칠정의 기발이승일도의 입장이 각각 그들의 문도로 이어져 크게 보면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라는 두개의 학파가 양
성장하였던 신흥사대부는 불교에 대항하는 개혁사상으로서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성리학은 당시 송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철학적으로 극복하고 성립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이기론(理氣論)은 성리학 전체의 기본이었고, 이에 바탕을 두고 인성론(人性論)과 수양론(修養論)이
철학 내지 실천 유학 정신으로 나아갔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등지에서 실천 유학을 진흥시키고, 국가가 위난에 처하였을 때에는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신은 근세의 의병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정인홍이 대북파의 영수로서 광해군 조정에 참여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