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교육에 큰 성과를 가져왔으며, ‘문학을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는 과목’으로 만들었다. 이전의 시감상 방법이라고는 시인의 전기적 사실이나 어구의 해석 풍이, 인상주의적인 비평과 개인적 감상뿐이었는데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신비평의 등장은 교사 입장에서 큰 것이었다.
문명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여기서의 억압은 시대상황이 시인의 상상력에 가하는 외적·타율적 억압이다. 식민지 시대의 미숙한 사회에서 억압의 원리는 절제의 원리를 값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현 교수는 <심상> 74년 2월호 ‘詩와 詩人을 찾아서’에서 절제론으로 한국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 궁극적으로는 시를 ‘어떻게’든지 감상을 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대부분 망설일 수밖에 없다. 이제 시의 중요 요소와 관련하여 ‘어떻게’라는 감상의 예를 나열하면, 주제나 소재의 관점이나 시어 또는 운율론의 관점, 심상이나 비유, 상징과
시, 자유시의 정착은 이런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형성되게 된다.
1. 자유시형식의 논의
자유시 형식의 논의는 백대진, 김안서, 황석우 등에 의해서 비롯된다. 백대진은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을 소개하는 글에서 “상징주의는 자유시로다”라고 하여 자유시 형식에 대한 최초의 발언을 한다. 이어서
시조의 창작에서 비롯된 우리 전통시가의 정형성 해체와 자유시 지향 운동은 드디어 민족적인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시는 처음 1910년대 중반의 아마추어 시인들, 예컨대 석천(石泉, ?-?,〈이별〉,1914), 김여제(金輿濟, ?-?, 〈산녀(山女)〉,1915) 등에 의해 처음으로 쓰여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