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사(古文辭) 연구
먼저 소라이 유학 사상의 기반이 되는 그의 학문적 방법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반은 보통 고문사학(古文辭學)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고대의 문장 양식과 구문법에 대한 연구라 하겠다. 물론 '고문사'라는 말 자체는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비롯한 일단
왕세정(王世貞) 등의 의고주의(擬古主義)가 성행하여 수많은 대가들이 배출되던 때였다. 이가원, 『한국한문학사』, 보성문화사, 1981, p216.
즉 어느 때보다도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이 넘쳐나고 한시가 유행하던 시대에 임제의 시문(詩文)활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그가 활동하던 조선 중기 16세기는
왕세정(王世貞, 1526-1590)사진(謝榛)종신(宗臣)양유예(梁有譽)서중행(徐中行)오국륜(吳國倫)
는 당순지 일파의 이론을 반대하면서 전칠자의 주장을 옹호하여 전칠자의 의고 주의 복고주의의 노선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2. 공안파의 등장배경
후칠자에 의하여 다시 만연해진 의고주의 기풍은 명나라 말기
왕세정이 아니면 지을 수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 책이 지어진 것이 시정의 방탕한 사내와 음란한 아낙을 묘사한 것으로만 본다면 본문의 내용과 별로 부합하지 않는다.
서문경은 원래부터 세족 출신의 유력자였기에, 권력자와 귀족들과 왕래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사족들과도 교분이 있었다.
그
擬古 옛것을 본뜸.
를 반대하였으며, 先秦 이래 특히 唐宋八大家의 문학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古人의 참뜻을 작품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송파의 노력도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문단은 다시 한 번 전칠자의 뒤를 이은 이반룡과 왕세정을 중심으로 하는 후칠자에 의하여 주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