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1운동 상과 폭력·비폭력문제
3・1운동은 한국근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서 더 이상의 도전을 받을 수 없는 확고한 역사성과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3・1운동이야말로 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신민통치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얻기 위해 감행한 항일민
운동론, 대중적 정치투쟁론, 실력양성운동론으로 대표하는 운동론이 있었으나 상호결합이 되지 아니하여 역사적 평가가 어렵게 되고 8.15광복이후에는 서로 자파의 입장에서 최선의 운동론을 자파 세력을 주도적 운동 세력으로 부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하의 한국민족운동사는 객관
운동에서 실제적으로 탈락했으므로 민족지도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부정론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환상을 품고 독립운동을 준비하였으며 운동 초기에 탈락했고 운동의 방침으로 비폭력운동노선을 내 세움으로써 운동이 실패하도록 방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인 틀
운동은 흔히 1차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동경유학생들의 2・8선언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서울에서 종교계를 중심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민족자결주의는 주로 유럽에서의 패전국의 식민지문제에 적용시키기 위한 원칙
운동사에 기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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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일제하 교회(기독교)의 전래
1. 개신교의 전래와 반봉건 자주운동
- 개신교의 전래와 새로운 조화의 모색 -
천주교가 전래되던 때에 많은 문제를 낳았던 기독교는 개신교를 유입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장애를 넘어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