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의 합류사실이 통보 이순신, 『난중일기』 정유년 11월 29일
되면서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됨.
-병력모집 :노량해전 참전 당시 약 1만여명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
3. 명나라 수군의 합류
1) 명 수군의 참전 배경
-해상을 통한 일본수군의 명(明)나라 직접 공격에 대한 걱정
-정유재란 이전에 수
노량해전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주둔해 있던 왜군은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病死들이었다. 그들이 주둔해 있던 곳에서 철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水師提督 陳璘과 합세하여 적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부대를 실은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열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I. 서론 : 임진왜란(1592년) 이전의 동아시아의 정세와 발발 요인
조선시대의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생각해 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을 말한다. 임진왜란이란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 2차례에 걸쳐서 1592(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임진년에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36세가 되던 1580년 (선조 13) 7월에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었다. 이 무렵에 좌수사 성박(成 )이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청 물건을 함부로 베어 갈 수 없다 하여 사람을 돌려보내니 수사가 크게 호통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