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육사의 작품활동과 생애
이육사의 작품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은 1933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을 통해서였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에 재능을 나타났다.
Ⅰ. 왜 이육사인가?
이육사는 우리에게 지절시인, 저항시인, 민족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육사는 문학인 이전에 독립 투사였다. 이것은 17회의 투옥과 옥사에서 보다 뚜렷하게 입증된다. 독립 투사이자 시인인 육사를 이 자리에서 우리가 논의해 보고자 하는 이유는 항일 저항 활동에 관해서는
Ⅱ. 이육사의 역사의식
육사 이원록은 식민지 시대의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을 초월한 시인임으로 해서 우리 근대시사에서 '저항시인', '민족시인', '청포도시인'이라는 닉네임이 이름 앞에 붙어 그의 시와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육사는 아은 이가호를 아버지로, 의병장 범산 허형의
육사(陸史)는 널리 알려진 그의 호이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유학과 한문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925년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이래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사망할 때까지 17회에 달하는 투옥(投獄)을 당할 만큼 맹렬한 독립 운동을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로 저항시인이다.
그
이육사는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가이면서도 독특한 시적 세계 인식을 보여준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의 독특한 시적 세계는 그만의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시어의 선택에서부터 출발하고 이러한 문학적 상상력은 작가가 자신의 의식세계를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