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을 만났다. 이황의 35세 연하인 이이는 성리학으로 시대의 병폐를 고쳐야 한다는 데 의기가 통했다. 이황은 제자 조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으로 이이를 촉망했다. 이이는 23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
1. 서론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정치가, 문인, 교육자로 불린다. 때문에 퇴계와 관련하여 저술된 논저는 확인된 논문만 해도 천여 편에 이르고, 단행본도 수 십 권에 달할 정도로 양과 질에 있어서 다른 어떤 인물보다 많이 연구되었다. 또한 퇴계가 이룬 뛰어난 업적은
이황과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됨.
『입학도설(入學圖說)』의 서문
금마군(金馬郡)에 귀양 와 있자니 나에게 『대학』과 『중용』을 배우는 초학자들이 한 둘이 있었는데, 거듭 자세히 설명해 주어도 분명히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에 주염계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이황, <도산십이곡>
(1) 퇴계 이황의 생애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연산군 7년)~1570년(선조 3))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경상북도 예안에서 진사 식埴의 아들로 태어났다. 퇴계의 생애는 태어나서 33세까지의 성장기, 34세부터 49세까지의 사환기仕宦期(관직에 있던 시기), 50세부터 70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