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황의문학과 그의의
우리가 사상가 혹은 철학자로 알고 있는 퇴계 이황이 남긴 시는 2000여 수이다. 일평생 성리학 연구에 매진한 이황의 삶에 비추어 보면 너무 많은 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시작詩作을 즐겼다. 또한 이황은 “시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릇되는
문학으로는 허균의 [남궁선생전], [장생전], 박지원의 [김신선전] 등이 있다. 남궁선생전은 남궁두란 인물이 자신이 겪은 신선수련의 과정을 작자 허균에게 들려준다는 줄거리의 내용으로, 과장된 도술 대결이나 기이함보다는 신선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내용이 담겨 있어 의의가 크다. 신선의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그는 21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고, 25세(1566년)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도 총괄했다. 선조가 난을 피해 개성으로 갔을 때 영의정이 되었고, 평양에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문학의 백미인 관동별곡과 속미인곡 등 주옥과 같은 가사문학을 지었는데 지금도 많은 가사문학이 현대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정철은 서인세력이었는데, 당쟁으로 인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고 사직하여 고향인 창평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자신을 이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에 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