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호 : 退溪, 자 : 景浩, 1501~1570)은 우리나라의 철학자를 거론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16세기문학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살았던 16세기는 사회, 정치사적으로 보면, 성리학적 사유를 지닌 사림(士林)이 지방과 중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은 <도산십이곡>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산십이곡>은 그의 시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한자어가 많이 생경한 감을 주지만, 이황이 고도의 한학자이면서도 한글을 통한 쉬운 어법을 구사하여 특출한 언어미를 보여 주었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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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의 시가로 표출하여 아름다운 정서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남도는 한반도의 어느 곳보다 따뜻한 기후와 조화된 산수, 넓은 평야가 잘 어우러진 전원적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따라서 남도권 시가가 융성하게 된 것이다. 즉, 남도는 시가문학의 융성에 대한 충분한 여건을 갖추었다는 이야기이다.
방법」이라고 정의하여 시조가 본질적으로 운율에 의하여 창작되는 문학이라고 하였는데 이는「詩는 美의 韻律的 創造」라고 한 포우(Poe)의 정의와 그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시를 형식과 내용면에서 본 것은 주로 19세기 낭만파 시인들과 비평가들이지만 시조의 정의 방법 또한 대동소이하다.
사림파의 공격 대상이었던 훈구파는 기본적으로 조선 초기에 있었던 수차례의 정변에서 양산된 공신과 왕비를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서울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가문간의 결속력은 강했지만 성리학에 대한 인식 수준이 사림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시가와 문장 능력을 중요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