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의 문제를 우리민족의 실력부족의 탓으로 상당히 돌렸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를 둘러싸고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여전히 쟁점이 형성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일제하의 민족주의운동 진영이 1920년대 이후 펼쳐나갔던 ‘문화운동’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이
하고 억압적인 일제 통치에 순응하는 것 아니면, 저항하는 것뿐이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래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독립운동은 기껏해야 ‘복국(復國)’, ‘복벽(復僻)’에 그쳤다. 새로운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체제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독립성과 민족사학으로서의 독자성이 함께 달성되어야 하는 과제와 전통적인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낡은 역사관을 극복하여야 하는 동시에 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켜야 한다. 여러가지 혼돈 속에서 해방 후 민족분단으로 남한은 실증사학이 민족주의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게 되었고, 북
운동과 그의 영향
일제는 전 민중적인 3.1운동에 의하여 큰 타격을 받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대책에 부심하였다. 3.1운동의 타격을 받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세 가지 방향의 변동을 보였다. 첫째는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정책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전선
하고 있다. 김일성이 어린 시절 민족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어린 김일성에게 애국을 계속 강조하였으며, 커서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성주’ 라고 지어주었다. 김형직은 1917년 서당교사로 있으면서 평양의 민족주의 지하독립운동단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