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에 학무국 편집과속 겸 편집서기로 부임하여 조선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17년 5월에서 1919년 6월까지는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사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를 겸임하였고, 1919년 6월에는 조선총독부의 교과서 편수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어사전』편찬에 참여했다. 이후 『조선어학사朝鮮
들어가며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란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보낸 공적인 외교사절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13년(태종 13)이었으나, 사행使行의 정사正使 박분朴賁이 중도에 병이나 중지되었다. 그 뒤 1428년(세종 10) 통신사란 명칭으로 정사正使
Ⅰ.서론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가장 멀게만 느껴지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에 대한 감정은 한일관계에서 간단히 정리 될 수 없는 그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침략 속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조선통신사라는 교류의 끈 놓지 않았고, 13세기 체제 이후 서구 열강의 급진
조선사편수회〉관제(官制)가 공포(公布)되었으며 이로써 하나의 새로운 독립관청의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朝鮮史編修會官制〉
제1조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의 관리에 속하며 조선 사료의 수집 및 편찬과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한다.
제2조 조선사편수회는 회장(會長) 1인, 고문(顧
조선의용군의 창설에서부터 해체까지를 통해 1930년대 이후에서 해방 전까지의 무장독립투쟁의 양상을 살펴보고, 여러 독립운동들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조선의용군이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 재고찰해보고자 한다.
2. 조선의용군의 탄생에서 해체까지
(1) 조선의용대(朝鮮義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