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제국주의의 지배 밑에 있는 전조선민중은 필연적으로 이 정치과정을 과정하여야 하며 그리해서 지금 그것을 과정하고 있다. <조선의 민족단일당>을 절규하며 조선각지에서 총역량을 이리로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럼으로 조선의 민족적 정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럼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
학교 교사, 1949년 부산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1950년 같은 대학 문리대 조교수가 되었다. 1959년 부산일보 논설위원, 1960년 부산대학교 문리대 문학부장을 지내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65년 복직되었으며, 1974년 정년퇴직 후 진보적 문학가들의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구인회.
․ 구인회(九人會).
구인회는 순수문학을 표방하고 문단의 중견급 작가 9명에 의하여 결성된 문학동인회로 1920년대 후반기에 등단한 중견 문인들과 1930년대의 신진 문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새로운 문학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은 주로 후자에 속하며, 발족 당시의 회원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써서 발표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줄곧 친일 연설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곤란을 겪었고,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7월 납북되었다.
이광수의 연도별 친일행각
1919년 이전
1919 ~ 1921년
1921 ~ 1937년
1937년
1939년 이후
제 1단계
임시정부에서
2년 동안의
독립운동
제 2단계
수양동우회 사건
제 3단계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정신
민족개량주의,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
의례준칙의 일본화, 생활방식의 일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