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근대적 사고를 받아들이고 서양문물을 접했지만 정치제도는 옛 왕조시기의 전제적 제도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복종은 최종적으로 천황에게서 근거를 찾는다.” 나루사와 아키라, 일본적 사회질서의 기원(한림신서 일본학총서 78), 박경수 역, 도서출판 소화, 2004, 121쪽
천황제는 일
그 자체의 중요성 보다는 일본에서 19세기에 이르러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와 조명이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근대 국가로의 일본의 발전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이 시기에 임진왜란의 연구가 활발했던 것은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적 법제 정비, 전국적 국민교육과 국민의무 상비군제도의 정비가 진행되었고, 일본형 입헌천황제 국체와 근대 관료제 등 근대적 국민국가로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대외적으로도 1871년 청과의 근대적 대등조약으로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한 이래 타이완사건(1874), 조선의 무력개항(1876), 류큐 병합(1879
인해 공장들이 대거 설립되면서 경공업 부문의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 민간인들은 서양식 머리ㆍ모자, 양복, 회중시계, 양력 사용, 서양식 식생활 등 일상생활에서 서양식 생활 풍습을 따랐다. 정치적으로는 의회 제도를 마련하여 1890년 선거를 실시하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국회를 개설하였다.
행사를 맡은 만큼 정치의 운세에 따라 교체가 되지만 천황은 그 신비함으로 인하여 세속정치의 성쇠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로서 황실의 혈통을 이어온다. 이는 바꾸어 보면 천황이 권위의 원천이면서도 세속지배의 실세와는 무관한 존재였기 때문에 천황제는 아무런 변동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