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결교회다.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성결교회는 처음부터 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성결교회의 처음 이름은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이었으며, 그 다음은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였다. 동양선교회라는 말이 성결교회의 명칭에서 빠진 것은 해
교회,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교회, 자체적으로 선교하는 교회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초청을 받은 네비우스는 2주간에 걸쳐 『중국보』외에 자신의 저서 ‘선교사업의 방안’과 ‘선교교회의 설립과 발전’ 등을 중심으로 선교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김대인, 숨겨진 한국교회사,
2. 주기철 목사와 배형규 목사의 활동
1)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주기철 목사의 활동
(1)신사불참배 운동과 주기철 목사
본격적인 항거운동은 1938년 초 전국노회에 신사참배가 강요된 때부터 일어났다. 2월9일 교세가 가장 강하고 한국교회의 지도인물들이 다수 있는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선교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도 한국인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보다 “순하고 감정적”(docile and emotional)인 것도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매우 빨리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또한 1907년1월14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 첫날 저녁 상황을 목격하였
교회에 와서 평양선교사들을 위해 사경회를 인도한다. 이 당시 하디의 설교는 어린 셔우드 홀의 가슴에 큰 파문이 되어 깊이 새겨진다. 이렇게 해서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해주에 결핵 요양원을 설립한다. 버림 받은 한국의 폐결핵 환자들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