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내걸고 주자에 대항한 사람이 육자 형제이다.
형제와 아호(鵞湖)에서 만났는데 이 일을 학자들은 철학사상 대서 특필할 만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 후에 남강군(南康郡)과도 알게 되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복구했는데, 육상산이 와서 “군자는 의(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
들어서기 이전을 들고 있다.
전통사회의 실학사상은 근대한국의 개화민중의식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학사상은
당시 주자사상(朱子思想)의 대응논리로 대두되었는바, 당시의 주자학은 전통윤리의 동요
라는 내적 갈등을 극복하기에는 그 사상적 한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회개혁의 인식
등장하는 것이다.
「중(中)」의 의미는 주자(朱子)가「불편불의(不偏不倚), 무과불급(無過不及)」라는 풀이한 것처럼 「기울어지지 않고 기대지도 않으며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 용(庸)에 대해서 정이천(程伊川)은 「불이(不易)」, 주자(朱子)는 평상(平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는
사상적 전통은 오히려 의리와 충절을 표했던 정몽주 계열이 잇게 된다. 결국 한국 유학의 정맥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조선전기 유학의 도학적(道學的)전개 양상을 나타낸다. 정몽주의 사상은 길재(吉再)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전승되어 한국 도학의
朱子와 程子에 의해서 이루어짐에 따라 인성론은 ‘이’와 ‘기’에 대한 존재론적 연구와 더불어 보다 구체적인 인성론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한국의 유학자들은 이에 대한 독자적인 철학적 논설을 보고, 특히 한국의 유학자들은 이에 대한 독자적인 철학적 논설을 보여주게 되어, 한국 특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