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한국 병합을 전후하여 공업전습소에서는 식민지 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같은해 4월 실과가 신설되고, 제 1회 제작품진열회를 개최했으며 제작품진열회는 실습작업의 관람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고 친근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민족
학제의 연계도 비교적 수월하였다. 그리고 선교사의 후원이나 과학기술의 선진성이라는 인식 때문에 전체 미국 유학생의 약 10.5%가 공학, 9.5%가 이학으로 전공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대학원을 졸업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도 이학 분야에서 4명, 공학 분야에서 1명이 나왔다. 그러나 일제의 미
학교 수준의 학제였다. 다음해에 가서야 예산이 확보되어 다른 전문학교들과 더불어 정식 공업전문학교가 공업전습소 특별과를 개편 확대하여 설립되었다. 학교 명칭은 관립 경성공업전문학교로서 일본의 고등공업학교와는 구분되어 불렸다. 그러나 전문학교라 할지라도 일제는 조선에 세운 경성공
학교만이 15년 전에 설치되어 그대로 유지되어왔던 것에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이 시기에 공업학교가 증가한 이유는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기술 인력의 진출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총독부가 1939년 일본 본토에 요구한 ’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에 묶인 공과계 졸업생은 약 3,400명 정도였는데 할당
유지하고자 했던 고구려는 통치이념으로 충⋅효를 기반으로 하는 유교를 받아들여 이를 관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다. 이를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으로 교육시설인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소수림왕 2년(372)에 중앙에 태학을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평양천도 이후에는 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