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는 일본에만 의지해서는 조선에서 요구되는 기술 인력을 충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공업계 학교를 증설하게 되었다.
공업학교 확충에 관한 논의는 1936년 후반 총독부가 조직한 교육조사위원회에서 개진되었지만, 큰 어려움은 학교의 설립형태와 경비를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요구할 경우 전문학교설립을 통해 그 요구를 수용할 생각이었다. 한편으론 조선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은 물론 해외로의 유학에 대해서는 철저히 억제하겠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
공업전문학교는 1915년 설립될 예정으로 계획되었다. 먼저 그 해 3월에 '전문학교규칙'이
조선인 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분법적 잣대를 적용할 경우 이들을 매국노로 매도할 수 있다. 사회진화론이 만연해 있던 당대 상황에서 고등교육은 시대적 요청이었고, 경성제대는 한국에서 고등교육의 정점인 대학교육을 배울 수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성을 배제하고 단순히 학교를 다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꽤 까다로웠기 때문에 조선인 유학생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과학기술 관련 학과가 갖추어져 있던 기독교계 학교에서 과학기술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과학기술 전공자로 이공계열로 진학한 사람은 한 해에 평균 2명 정도뿐이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선진과학기술을 습
학교로 명칭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전까지의 실업교육은 농업, 공업, 상업에 불과하였지만 이후 실업교육은 교육, 수산, 의학 등 범위가 넓어지며, 일부 실업교육학교는 전문교육학교로 격상하였고 뒤에서 중심적으로 살펴볼 경성고등공업학교도 전문교육학교로 격상된다.
제 3차 조선교육령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