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전통시대에 지도는 원초적으로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조선이 지리정보를 확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중국은 17세기까지도 중요 지리정보를 조선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다. 새로운 지리정보는 대내적으로도 통제되었다. 조선왕조도 지리지식들을 가급적 민간에 유출시키지 않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16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조선지식인들은 조선을 여진족의 상국(上國)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여진족을 열등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명청교체의 흐름이 가시화되고 있었던 17세기 초에도 의연히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결국 남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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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만남은 17세기 초부터의 일이며, 그들의 손에 의해 한역천주교서가 조용하게 조선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받아들임이 1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는 가운데 국내의 선각적 지식인들은 이렇게 조선 후기 사회로 도입된 한역천주교서를 학문적 호기심에서 가까이하고 열독하였다.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중국에서부터 유입된 한자로 번역된 서학서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사상을 뜻하는 내용들과 서구의 과학 기술을 의미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중국을 통한 서양문화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는데, 최초의 것은 세계지도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16세기말)과 병자호란(17세기 중엽)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사회체제가 변화를 겪게 된다. 사회계층의 최하위 기반을 담당하고 있던 노비계층이 축소되면서 노비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1801년 공노비제도 폐지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양반계층이 농촌의 토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