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1936년 8월 ‘정치론의 한 토막’이란 글을 통해 사상전향을 밝히고, 1938년 1월 친일 사상단체인 綠旗聯盟에 가입, 주저『조선인의 나아갈 길』을 출간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역사에 대한 반성,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해 朝鮮人의 길은
년대 초두부터 명백하게 경향적 색채를 띤 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또한 김복진(金復鎭)과 연학년(延鶴年) 등은 그 이전에 계급주의를 지향한 사회조직에 관계하고 있었다. 여기에 기폭 장치를 마련한 것이 동경 유학생 신분의 김기진이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포된 신흥사회과학에 빠져든 다음 특히
Ⅰ. 서론
1920년대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유입과 확산의 시대적 배경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당시 지식층의 일부가 사회주의 사상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토대로 한 사회주의
년대 후반기에서 이어져 왔는데, 주로 반일사상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역사의식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이나 민족성을 찾으려는 주제가 소설의 주조를 이룬다. 만주사변이후 일제의 파시즘 강화로 문화통치가 민족말살정책으로 변하는 억압적인 시대여건과 함께 애국계몽기 전기
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한「흑치상지」같은 역사소설을 썼는데,「흑치상지」는 연재중 검열에 걸려 발표를 중단당하였다. 그는 침묵으로 버티다가 1943년 서울에서 병사했다.
아내에게는 그 말이 너무 어려웠다. 고만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벽이 자기와 남편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