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고려시대에 처음 간행된 『삼국유사』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전하는 『삼국유사』의 완전한 판본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中宗壬申本이다. 그 중 국내에 전하는 것은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과 고려대 도서관만송문고 소장본이다. 그 외 일본에 전하는 것으로 天理大가 소
奎章閣)을 통해 인재들을 양성하고, 그들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세종과 정조대의 위대한 업적이 탄생할 수 있었다.
세종과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왕들은 누구나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양의 성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향
‘ 김락서 , 원주리 ’ 강독
金洛瑞
金好古洛瑞 , 字文初 金洛瑞 : 조선후기 문인. 자 문초(文初). 호 호고재(好古齋).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규장각(奎章閣) 서리(胥吏)를 역임하였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정조 때 같은 처지의 천수경(千壽慶) 차좌일(車佐一) 조수삼(趙秀三) 등과 교류하였으며,
奎章閣 檢書官)으로 활동을 했으며 『북학의』를 저술하여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정리하였다.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 기구 등 사회제도의 개선에 치중했다는 경향에서 경세치용 학파라고 한다면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 기술의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용후생 학파
奎章閣)을 설치하여 문장에 뛰어난 학자들을 외각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했을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와 함께 이덕무는 수위(首位)로 뽑혀 임용되었다. 그는 검서관뿐만 아니라 외직에도 나가서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적성 현감(積城縣監)
奎章閣)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됐다. 규장각은 정조가 젊고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인재를 골라 더욱 학문에 정진하게 하고 장차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삼고자 만든 것이다.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측근으로 활동하게 됐다.
화성에 발현된 기술관료 다산의 역량
31세 때(임자년, 1792) 봄
奎章閣)이 설치되었다. 순조 33년(1833) 희정당과 대조전 등 내전의 많은 전각이 화재로 사라졌으며, 헌종 12년(1846)에는 후궁들을 위한 낙선재 일곽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이곳에서 도망치기도 하였으며, 고종 21년 갑신정
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홍인한·홍상간·윤양로 등을 제거하였다. 한편 세손 때부터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