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이고 강력한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던 북인계열을 몰락시킨 인조반정 이후 정권다툼은 남인과 서인으로 좁혀졌다. 그중에서도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에서 사계 김장생을 거쳐 내려오는 서인의 정통 학맥을 이어온 인물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암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學統)을 이어,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사상을 신봉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으나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양설을 모두 배척, 절충적 이론을 세웠다. 1882년(고종19)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이 되고 그 후 강원도 도사(都事) ·장령 ·순흥(順興)부사 ·중추원참의 등에 보직되었
學統)은 고고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고학사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고고학사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며,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문화사 고고학, 신고고학, 탈과정주
이때는 곧 사림파 학자들이 주체가 되어 성리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때이므로 그들의 학통(學統)의식을 고려하면 사람파의 연원은 고려 말의 절의파에서 찾을 수 있다. 기대승(1527~1572)은 우리 나라 성리학의 학통을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學統)을 이은 이동을 만나 사사하고, 차츰 유교로 기울어져 신유학의 정수(精髓)를 계시받았다. 주자의 출현은 성리학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 단순히 중국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성리학이 중국에서 일어나게 된 까닭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이후 많은
(1) 서론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618~907)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960∼1279)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1130~1200)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원·명(1368∼1644)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학과 서원은 같이 흥
才ㆍ情ㆍ氣의 발산, 意氣의 숭상, 예술주체가 나타나 미적 자유를 마음껏 나타내던 고려 시대의 문학이 극에 달했을 때 人文界는 새로운 정신주체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북방 대륙과 끝없는 불편한 관계로 편할 날이 없는 고려였지만 한편으로는 대륙의 문화를 계속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규남 하백원(河百源)
출생 ~ 사망 : 1781년 ~ 1844년
자 : 치행(穉行), 효일(孝一)
호 : 규남(圭南)
본관 : 진주(晉州)
-생애
하백원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다. 순창의 신경준(申景濬), 장흥의 위백규(魏伯珪), 고창의 황윤석(黃胤錫)과 함께 호남의 4대 실학가로 꼽힌다.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치행이
1. 머리말
2. 개화 세력의 대두
1). 개화당의 형성
2). 개화당의 개혁 이념
3.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
1). 개화 정책의 추진
2). 위정척사운동
3). 임오군란
4. 갑신정변
1). 김옥균의 개화사상
2). 삼일천하로 끝나다
3). 국가별 갑신정변 연구 동향
5. 근대적 개혁의 추진
1). 갑오개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