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편찬하여, 이를 뒷받침하였다. 이로 인하여 송대 이래 발달한 신유학인 주자학은 확고한 관학(官學)의 위치를 고수하여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학(異學)의 금지와 문화계의 창의력을 결여시키고 사상의 자유로운 발전
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편찬하여, 이를 뒷받침하였다. 이로 인하여 송대 이래 발달한 신유학인 주자학은 확고한 관학(官學)의 위치를 고수하여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학(異學)의 금지와 문화계의 창의력을 결여시키고 사상의 자유로운 발전
性理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의 주석서(注釋書)를 칙찬(勅撰)하였는데, 이것은 과거(科擧)의 참고서가 되어 사상통제적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기에 왕수인(王守仁:陽明)이 송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인격주의의 이상철학(理想哲學)
性理大全』등의 책을 읽어 보니 전일에 스스로 사색하여 깨친 바와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 후 31세, 34세, 56세 때 벼슬을 할 기회가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6세 때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성현의 말에 대해 선유들이 이미 주석을 낸 것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지만, 아직 설파하지 못한 것에 대해
性理大全’‘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심경(心經)’‘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貞觀政要)’‘국조보감(國朝寶鑑)’ 등도 사용하였다. 강의 방식은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음독, 번역, 설명하고 나면, 세종이 이를 반복한 후 질문도 하고 다른 참석자들도 보충설명을 하는 식으로 이
性理大全)』 중 첫째 권과 마지막 권을 빌려 와 읽고 『소학』을 다시 공부하였으며, 영주에 있는 의원에 가서 의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20세경에는 주역을 연구에 몰두하여 침식을 잊고 공부만하다가 신체적 허약증이 생겨 평생의 고질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퇴계는 이러한 병을 얻은 원인이, 학문을
性理學(성리학)이 활발하게 전개된 관계로 조선조 유학을 전반적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예학이라는 것을 명명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학의 윤리 도덕의식이 시대를 통해 학문적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용어이다. 장세길, 사계 김장생의 예학사상, 경인문화사, 2006, 2~3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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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탈피하고 숭명정책(崇明政策)으로 전환하였다.
세종조에 이르면 유교의 확고한 기반이 갖추어 진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세종 2년 3월)하여 유교교육과 새로운 제도의 조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때의 정치와 학문의 기본은 명실 공히 유교이념(儒敎理念)과 성리학(性理學)이었다.
性理學을 그들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는다.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된 계기를 보통 安珦, 白頤正 등 원에 유학했던 학자들의 도입과 보급에서 잡고 있는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서부터 주자성리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楊時・文彦博・王安石 등의 유학이 이미 고
려에 알려져 있었고 고
性理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이 용어는 조선 후기에 성리학에 대립하여 나타난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각은 나라를 빼앗긴 채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식민지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던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식민사학계는 조선은 스스로 발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