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조선 공산주의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일환으로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전체상을 이해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연구대상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분단체제 아래에서 남북한의 민족해방운동사 서술은 협소하고 빈약한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조선 공산주의 운동사를 다룬 기존
1. 머리말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모두 실패하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대세를 이루는 2007년에 공산주의 운동사를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산주의 이론자체가 틀렸다고 극단적인 청산을 하는 사람이 생기고, 과거 공산주의 운동은 공산주의 운동이 아닌 국가주도의 자본주의 운동이
: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독립운동과 8.15해방 이후 신국가건설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적 이념은 다양하였지만, 학계에서는 크게 보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독립운동도 민족해방운동의 형태를 보였기에 ‘민족주의 vs 사회주의’가 아닌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구도로 설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모두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1923년 코민테른은 조선 문제에 대한 방침을 조선 국내에서 혁명운동을 중시 이전에는 러시아혁명을 지키기 위해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혁명운동에 참가하도록 하는 것이 강조되었으나,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관련 활동
3.1 운동 후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 입당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활동
1922년 3월, 극동제민족대회에
이르쿠츠크파 대표단 참여
1922년 4월,공청조직의 책임자로 국내파견
1924년 출소 후 신사상연구회 가
1995년, 성재 이동휘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이는 이동휘를 비롯해 그동안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만주·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재평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뒤이은 냉전체제의 몰락은 반쪽에 불과했던
고려인의 활동
¡°당시 소련공산당 및 중국공산당과 북조선 로동당과의 관계에서 소련공산당적자와 중국공산당적자의 우월성이 작용하여 그것이 만주파, 연안계, 소련계가 국내계에 대하여 우위를 확립하는 데 하나의 요인이 된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이기 때문에 초기 건설과정에서 고려인들의
여운형은 학계의 연구에서는 좌파보다는 중도파, 중도좌파 정도로 분류되고 있는 편이다. 해외 독립운동 시기에 고려공산당에서의 활동 등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활동이 좌파적 색채를 극단적으로 띠지는 않았다는 평이다. 여운형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 독립을 위해 했던 여러 활동들은 해방 후 좌우
Ⅰ. 박헌영의 생애
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강령과 조직체계를 갖춘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려 하였다. ‘서울파’로 불린 이들은 김사국을 코민테른의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으로 승인받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홍명희, 김찬 등은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강습회와 토론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