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개요
굿판의 변화와 무가 연구의 방향 설정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마을굿의 쇠퇴와 함께 개인굿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한국의 공동체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사회 전반의 현상과도 맞물리는 것으로, 두 가지 양상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현재 남아 있는 마을굿에서 무당보다도 마을 사람
굿이나 독경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굿은 노래가 아닌, 말로 구연되는 부분도 있고 행위와 대사로 표현되는 부분도 있어서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굿에서 행위와 대사로 표현되는 부분은 무극이다. 무극을 '굿놀이'라고 하거나 문학작품 속에서 무가의 갈래의 범주에 포함한
놀이가 연희되었으리라는 것은 용이하게 상상된다. 씨담그기, 묘판만들기, 씨뿌리기, 모내기에 따른 파종의례, 수릿날, 유둣날, 풋굿, 기우제 등이 성장의례, 천신, 추수감사제 성격의 제전 등의 수확의례 때에 인간의 원초적인 신앙에서 우러난 각종 놀이가 베풀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기악과 우리의 산대도감극을 가면의 형태, 색깔, 소도구, 오공, 팔먹중․완보와 가루라․금강, 관 쓴 중과 바라문, 노장과 곤륜, 취발이와 역사, 신할아비와 대고, 샌님과 취호, 무악과 무덕악이 대응됨을 밝히고 우리의 산대도감극은 서역계통의 탈놀이로 기악과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Ⅰ. 개요
문화의 저층에서 오늘날까지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민간연희의 질긴 생명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문화재’ 차원에서 유지 보존되는 가면극 등속을 두고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과 호흡하면서 자생적으로 살아 움직여온 연희, 예컨대 굿놀이[무극]를 두고서
Ⅰ. 서론
풍물굿의 기원은 원시사회의 풍농과 안택을 비는 제천의식이나 일의 율동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점차 집단생활 속에서 놀이형태, 축원형태, 연극형태로 발전되고 사람들이 이를 즐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시시대의 제천의식 또는 집단적 바람을 비는 제의형태는 종교적 의식을 주재하고
굿놀이를 했다는 풀이이다. 표면적으로는 첫 번째 해석이 타당할 것 같으나 심층적으로는 뒤에서 소개할 은산별신굿의 유래설화와 마찬가지로 패전국의 전사한 장졸들에 대한 위령제의 성격이 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 같다.
아무튼 정월 초에 고제당(故祭堂)과 도가(都家)에서 제사
1. 서부 평야 지방
1) 전주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고, 조선 때는 호남 제일의 행정중심지였다. 조선 때 전주는 왕실(전주 이씨)의 본관으로 중시되었다. 한지, 화선지등 전통공업이 이어져 내려와 유서 깊은 도시이다. 전주는 군산, 김제, 정주, 남원, 진안 등지로의 교통이 편리하고, 상업 및 교육
1. 연행현장과 연행방식에 주목하는 이유
우리 민속극은 민중들의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여러 학자에 의해 주목되어 연구되어 왔다. 민속극은 민중들이 지닌 사회의식을 비판적 풍자를 통해 표현한 예술이다. 그런데 민속극의 내용은 고정적이지 않고 구비전승 되어오면서 그때 그때의 민중의식
Ⅰ. 민속놀이의 세 갈래
․ 무당의 굿놀이 : 굿거리 가운데서 대화와 극적인 행위를 통하여 연극적으로 전개되는 것.
․ 광대의 탈놀이 : 탈을 이용해서 하는 놀이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며 대사를 하는 연극의 형식을 갖춘 우리나라의 민속놀이.
․ 남사당패의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