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의 조카 김춘택(金春澤:1670~1717)으로부터 이재(李縡:1680~1746), 이양오(李養吾:1737~1811), 이우준(李遇駿:1801~1867) 등의 사대부 남성 독자들은 물론 사씨남정기를 가장(家藏)의 보물로 소중히 여기던 여항의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규범적 질서에 틈입하여 규범적 질서를 와해시킬
김만중(金萬重)은 인조 15년 1637년에 태어나서 숙종 18년 1692년에 죽은 조선조 명문의 양반관료였으며 대 문학가였다. 그는 광산(光山) 김씨(金氏) 거족인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요, 병자호란 국치의 한을 품고 강화도에서 자결한 충렬공 김익겸의 아들이며, 숙종의 초비인 인경황후의 부친 광성
김만중의 삶을 연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조 14년 (1636) 0세: 병자호란 발발, 부친과 조모 자살함.
인조 15년 (1637) 1세: 김만중 출생함.
인조 18년 (1640) 4세: 조부 사망함.
인조 22년 (1644) 8세: 외조부 사망함.
효종 원년 (1650) 14세: 진사 초시에 합격함.
효종 3년 (1652) 16세: 진사 복시에
김만중(1637 ~ 1692).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로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자가 중숙(重叔)이요, 호가 서포(西浦)다. 그의 호 서포는 그가 평안북도 선천(宣川)에 귀양 갔을 때 그곳의 지명을 따서 스스로 지은 것이다. 그의 집안은 광산(光山)은 김씨 명문거족이었으니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그의 증조할아버지다. 김장생은 율곡(栗谷)
우리는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을 이야기 할 때, 흔히 『구운몽(九雲夢)』과『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창작한 17세기 소설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작 후손들에 의해 정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김만중의 문집인 『서포집(西浦集)』의 어디에도 그가 창작했다는 소
Ⅰ. 들어가며
16세기 후반에 중심 활동을 한 서포 김만중은 <구운몽>을 남겨놓았다. 그는 당 시대 최고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구운몽>속에 당대의 동양인의 이념과 철학을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담았다. 인간이 지닌 쾌락의 욕망이 계기가 되어 갈등이 시작되며, 그 과정을 이루는 몽유 속에서의 인
김만중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것은 劃을 그어놓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말한다면 김만중은 당시 문화적인 모든 현상이 중국문화권에 꽁꽁 묶여 있을 당시, 한국인은 한국어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뛰어난 國民文學論을 제창하였을 뿐 아니라, 詩文에 있어서나 소설에 있어서도 이들에 대한 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