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년, 행정구역 제도가 9주 5소경으로 정리됨에 따라 완산주와 무진주를 설치하였다. 완산주에는 10개의 속군, 31개의 속현, 소경으로는 남원경이 설치되어 관할하에 들어갔으며, 무진주에는 14개의 속군, 44개의 속현이 관할이 되었다. 757년, 완산주는 전주, 무진주는 무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무진주 이며 직할 3현인 미동부리현(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하였으며 전남지역에는 13군 42현이 있었다.
3.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것은 경덕왕 16년(754)의 일이며 이 떄에 전국을 9 주로 나누고 그 아래 군현을 두었다. 양주에 금해경,
무진주-광주목 등으로 지명이 자주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1430년(세종 12)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1451년 다시 광주목으로, 1489년 광산현으로, 이후 광주목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며, 강등과 승격이 자주 발생하였다. 1896년(고종 33) 광주군에 전라남도관찰부를 두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후삼국 시대는 통일신라 시기 지방의 호족들의 성장으로 인해 신라 여러 곳에서 국가가 생기면서 세력을 다투던 시기이다. 892년, 신라의 비장 견훤이 서남부의 무진주를 점령한 후 936년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킬 때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통일신라 이전, 신라, 고구려, 백제가 대립하던 시기
)의 아들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聞慶市 加恩邑)에서 태어났다. 신라에 태어나 서남해(西南海)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9C말, 신라 각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남(국가를 세워 신라에 대항한 견훤, 궁예)
궁예와 견훤이 각각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세움 신라 위축
각 지방에 호족들 할거 견훤과 궁예, 호족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
1) 견훤 ① 무진주에서 농민 반란군을 끌어들여 세력 형성
② 완산주 지역으로 도읍
무진주)를 자신의 중심지로 삼으며, 한반도 곡창지대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고 경상도 내륙 지방으로 전략적 방향을 돌렸다. 견훤은 무인의 기민함과 지략으로 후삼국의 한 왕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송악산 주변 일대를 토착기반으로 삼아 그 지역에서 가장 큰 해상세력과 경제기반을 확보한
무진주를 습격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고기>라는 책은 현존하는 책이 아니어서 어떤 종류의 책이었는 지는 알수 없지만 , <삼국사기>인용된 <고기>의 중요한 내용은 고구려 백제에 제사에 관한 내용도 있기는 하지만 신라의 왕들이 행한 행사의 연대를 기술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삼국유사>에
무진주에 이르러 주리(州吏) 안길의 후대를
받고 떠날 때 안길에게 ‘나는 경사인(京師人) 으로 내 집은 황룡 ․ 황성의 두 절 사이
에 있고, 이름은 단오(端午)이다. 그대가 서울에 오면 내 집을 찾아오라.’하였다.
뒷날 안길이 경중제조를 상수하는 향리로 서울에 가 단오집을 찾으니
무진주(광주)를 점령했다. 그리고 견훤은 이를 이용하여 자기의 세력을 키웠다. 이어 그는 북쪽으로 올라와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정하여 후백제를 세우고,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 후 백제의 부흥을 구호로 내걸고 영토 확장에 힘쓴 견훤은 옛 백제 땅인 전라도·충청도 일대의 비옥한 곡창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