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이다. 그의 자세한 행적을 살펴보면 더욱 가슴이 아파오는데 그 이유는 그가 구한말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동학의 후신 천도교(天道敎)를 대표하는 종교지도자이자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 33인 중 한사람인 민족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일제시기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에서
2.2. 이광수의 변절 및 친일 행각
2.2.1. 이광수의 변절
1917년 이미 무정으로 유명해진 이광수는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갖고 상하이로 건너간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1. 연구배경
본 조에서는 연구 과제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반미감정, 독도문제, 동북아 균형자론 등 다양한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조원들의 관심문제가 매우 다양하여 모든 조원들의 관심을 충족할 수 있는 한 가지 주제로 논의를 예각화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접하
현재 나라 안팎으로 일어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은 과거사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새김질하게 한다. 그 한 가지는 80년대 이후 일본이 과거 아시아 침략 행위를 합리화하면서 공공연히 신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신군국주의 로의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가지는 나라 안에 강제
최린, 백용성 등이 글을 기고했다. 많은 원고를 총독 검열에서 삭제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만해는 굴하지 않고 언론활동에 필요한 세계정세에까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고했다.《유심》잡지 제2호를 내고 제3호를 만들 무렵, 세계정세는 급격히 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갔
최린과도 사귄 뒤 그해 10월 귀국.
-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게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
- 12월 10일,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
1910년
-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1911년
-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 대회를 개
<이혼 후의 삶>
남편 – 나혜석의 재산분할 및 생활비 지불 X
최린 – 출세 가도
나혜석 – 사회적 비판, 경제적 궁핍, 정신적 고통을 받음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한 남편이나 최린 모두 실질적인 섹슈얼리티의 문제에서는 여느 남성과 차이가 없었다. 그녀의 자유로운 연애관은 프랑스
최린이란 남자와 바람을 피게 된다. 이로 인해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고 자식들도 뺏기며 화가로서의 평판도 나빠져 가지만 같이 바람을 핀 최린은 친일파로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나혜석은 유독 자신만 피해자가 되어 점점 불행해지는 것이 여성에게만 정조 관념을 요구하는 관습과 이혼녀
최린 등이 독립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최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한 개의 종교 단체가 할 것이 아니라 각계 인사를 망라해서 거족적인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으로 구성된 33인의 민족 대표가 모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낸 것이 바로 1년 전인 1934년이었다.
나혜석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혼 당시의 2년간 취가하지 않겠다는 김우영의 각서가 휴지조각이 되고, 아내도 함께 노력하여 모은 부부의 재산에 대해 이혼 때 배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