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

 1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
 2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2
 3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3
 4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4
 5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5
 6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6
 7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7
 8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8
 9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9
 10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0
 11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1
 12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2
 13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3
 14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4
 15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5
 16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6
 17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1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교육철학] 퇴계 이황(1501~1570)의 교육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성리학과 양명학의 비교
1) 성즉리와 심즉리
2) 격물치지의 해석

2. 성리학의 교육관, 이상적인 인간상
1) 성리학의 교육관

2) 성리학의 이상적 인간상

3) 성리학의 전래

4) 조선의 성리학

2. 머리말
3.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4. 성학십도(聖學十圖)
5. 사단과 칠정의 의미
6. 사단칠정에 관한 논의 과정
7. 이황과 이이의 비교 분석

1) 이황 李滉 [1501-1570]
2) 이이 李珥 [1536-1584]
3) 이황과 이이의 사상

1)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2) 이황의 사상

3)이이의 사상

4) 이이와 이황의 사상 비교



8. 요약 정리
본문내용
6. 사단칠정에 관한 논의 과정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사단과 칠정은 본래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이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는 것은 권근의 ‘입학도설’에서부터 시작한다. ‘입학도설’ 가운데 ‘천인심성합일지도’를 보면, 마음에 리와 기라는 두 개의 원천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리의 원천은 성으로 인의예지신인데, 여기에 나오는 정이 사단이다. 그리고 기의 원천은 칠정과 같은 선에 설정되어 있다.
권근은 칠정이 “드러난 것 중에는 간혹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니, 성의 발로라고 해서 사단과 똑같이 정 속에 배열할 수는 없다” 라고 하며 칠정도 성의 발현체이지만 악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순선한 사단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종 때의 유학자 유승조는 ‘대학십잠’, ‘명명덕잠’에서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나누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정은 성에서 움직이니 순선하고 섞임이 없다. 의는 마음에서 발현되니 선과 악의 기미가 된다. 리가 움직여 기가 끼면 사단의 정이고, 기가 움직여 리가 되면 칠정의 정이다.”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설명해 논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정지운의 ‘천명도해’이다. 퇴계보다는 여덟 살 아래로, 호는 추만이고 김정국의 제자였다. ‘천명도해’는 본래 정지운이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성리학의 기본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인 것인데, 제작 연대는 1542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퇴계가 세간에 떠돌던 ‘천명도해’를 보고 잘못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추만을 만나 함께 토론하고 연구해 수정본을 확정했다. 이때가 1553년으로 퇴계의 나이 52세였다. 그리고 1559년에 고본 기대승이 수정본 ‘천명도해’의 내용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는 데, 이것이 한국 철학사의 획기적인 사건인 ‘퇴고사단칠정논변(退高四端七情論辨)’의 시작이었다. 당시 고봉은 퇴계보다 스물여섯 살이 적은 청년 관료였다.
정지운은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라고 주장했는데, 퇴계는 이 문장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 라고 수정했다. 이렇게 수정한 데는 일재 이항이 주장한 “정은 기의 영역에 둘 수 없다.”라는 견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항은 “사단은 성이 발현한 것으로 순선하며, 칠정은 리와 기가 함께 발한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항은 하서 김인후와 사단칠정에 관해 논의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학자들 사이에 사단칠정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던 것이다.
1559년 퇴계는 고봉의 비판을 받고, “사단의 발동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를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쳤다. 이에 대해 고봉은 다시 비판하는 서신을 보냈으며, 1560년에는 퇴계가 자기 학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것이 ‘논사단칠정제일서’이다. 그 이듬해 1561년 고봉이 ‘제일서’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받아들여 “사단은 리가 발현함에 따라 기가 그것을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함에 따라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라고 수정했다. 이것이 ‘논사단칠정제이서’이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 서신이 오고 갔지만, 퇴계가 더 이상 수정하지 않았고 또 고봉이 퇴계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논변은 종결되었다. 논변이 시작 된지 8년째 되던 1566년의 일이었다. 사단칠정논변은 주장과 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재비판과 재재비판이 이어진 치열한 논리 싸움이었다. 여기에는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순수하게 학술적인 합리성과 엄밀성만이 추구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의 주자학이 한국의 성리학으로 토착화되는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유학사상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7. 이황과 이이의 비교 분석
1)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시대의 학자·문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시호는 문순(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