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의 생애와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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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에우리피데스의 생애와 작가 소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에우리피데스의 생애와 작가 소개]
1. 에우리피데스의 생애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3대 비극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에우리피데스의 삶에 대한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져 있는 바로는 그가 Mnesarchides라는 사람의 아들로 Salamis 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생동안 약 90여 편의 극을 썼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은 적은 4번이고 5번 째 상은 그가 죽은 뒤에 주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BC 431), (BC 428), (BC 415), (BC 412)등이 있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작품은 총 19편이나, 그 중 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11세기의 필사본인 는 주로 문학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거나, 그의 희곡에서 이끌어낸 추론이라고 볼 수 있어 그 자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일편에는 에우리피데스의 어머니가 야채장사를 하는 비천한 집안의 아들이였다라고도 알려져있지만 그가 어린 시절 문화행사에 참여하거나, 소년 시절 종교의식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맡은 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부유한 지도급 가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에우리피데스의 공적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에우리피데스가 외교적 사명을 띠고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 간 적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주석을 단 고대 주해자가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일부 근대 학자들은 이 고대 주해자가 아테네 웅변가인 히페리데스와 그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음). 에우리피데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언급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후세의 전설은 그를 위해 극적일 만큼 비참한 결혼생활을 꾸며냈다. 이것은 분명 희극작가들이 그에게 던진 우스개를 바탕으로 한 허구이며, 그의 희곡에서 자주 나오는 사악한 여인들은 분명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인물일 거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지지했을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멜리토와 결혼해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아들 가운데 하나는 꽤 유명한 시인이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 〈주신 바코스의 시녀들 Bacchae〉을 무대에 올렸다.
에우리피데스는 생애의 마지막 20년 동안, 근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비극이 아닌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 비극들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낭만적 희곡이나 희비극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런 유형의 희곡으로는 〈이온 Ion〉과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및 〈헬레네 Helene〉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비극과는 달리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을 전혀 다루지 않았으며, 이 작품들에 신들이 등장한다 해도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희곡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순수한 극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 에우리피데스는 그가 구제할 수 없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한 현실 세계에 잠시 등을 돌리고, 무대의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2. 에우리피데스의 작가관
그의 극작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많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7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난 뒤 이민자들과 여러 다른 나라의 방문객들로 아테네의 문화는 다양하고 개인적이 되었다. 많은 힘없는 사람들은 성 안에서 자신의 집이 불타버리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아야했다. 개인의 삶이 비참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철학자와 과학자는 전통적이던 사고방식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존경했던 그의 스승인 아낙사고라스와 프로타고라스가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고문을 당한 뒤에 아테네에서 탈출하는 것을 보았다. 에우리피데스를 존경했던 젊은 사상가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비난을 받았으며, 새로운 신들을 끌어들이고 젊은이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결국 스파르타에 의핸 패배에 반감의 고통 속에 자신의 고국인 아테네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관주의와 애국심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분노와 아이러니로 표현되었다.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의 격렬한 풍자와 신랄한 빈정과는 다르게, 비극을 즐겨 썼던 에우리피데스는 상징적이고 깊은 표현으로 아테네인들의 괴로운 삶을 그려냈으며,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처럼 절대적인 가치관과 낙천적인 인생관을 노래하지는 않았다.
에우리피데스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그의 작품의 성격을 보거나 후세 사람들이 만든 조각상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표정을 보아, 천성이 명상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 내면의 지성과 영혼이 빚어내는 개인의 비극을 주로 썼다. 이 때문에 다른 희곡 작가들과 비교해서는 인기가 많이 있던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가 전쟁이 끝난 뒤 BC 408년, 마케도니아의 왕 아르켈라오스의 초청을 받아 아테네를 떠나고 타지에서 외롭게 숨을 거둔 뒤에 비로소 인정을 받았으며, 오히려 죽은 뒤에 뭍사람들의 예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3대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중에서는 가장 근대적인 작가였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의 명성을 압도하여 후세의 문학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었다. 그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많은 지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청년 시절에 소피스트로 대변되는 궤변 사상의 새로운 경향과 동요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당시의 다른 비극 시인과는 다른 새로운 경향과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