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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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실록을 공부해 오면서 자신이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서 리포트를 써 보라는 숙제를 내 주신 후 어떤 주제를 정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온라인 체질이 아니다. 컴퓨터 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자료를 찾기보다는 오프라인으로 자료를 찾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서점에 들렀다. 서점에는 세종시대에 관한 여러 것들을 심도 있게 다룬 책들이 많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세종에 관한 여러 책들을 검색해 본 결과 내가 정한 것은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이란 책이다. 한글창제, 국토 확장, 과학발달과 같은 세종의 업적은 다른 왕들의 업적에 비교도 안될 만큼 훌륭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하기에는 물론 세종의 위대한 리더쉽이 있었겠지만 그 리더쉽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인재들의 일생-특히 세종대왕당시의 업적에 관한 일-에 대해서 쓴 책이다. 이 책을 집으면서 나도 세종대왕 당시 어떤 인재들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겼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보고서를 쓰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솔직히 상당부분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이란 책에 바탕으로 써졌다. 여러 시험과 개인적인 일로 바빠 부득이하게 이 책 한권만 읽고 보고서를 써서 다소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겠다. 그것이 이 보고서를 적으면서 가장 아쉬움으로 남았다.
2.정치인재들
1)황희
황희를 빼놓고 어찌 세종시대를 논하랴. 그는 세종8년 우의정에 제수된 이래 1449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정승자리에 있었고 1432년부터 1449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세종 재위 31년 중에서 24년 동안 정승직을 수행 할 만큼 세종의 황희에 대한 신임은 아주 각별했다. 황희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을 모셨다. 이렇게 4명의 왕들을 모실만큼 그의 출세길이 평탄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태조와는 기복(3년상을 모두 치지 않고 관직에 돌아오는 것)문제로 대립했고 정조 때에도 미움을 받아 쫒겨나가기 까지 한다. 하지만 태종은 황희의 능력을 높이샀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조말생이 황희를 탄핵해야 한다고 하자 “ (중략)황희는 내가 일찍부터 한 집안사람처럼 대해왔고 (생략)”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하게 대해왔다. 하지만 양녕문제로 서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양녕은 한창 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로 여러 여자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녔다. 그는 심지어 자신과 친척인 사람들의 여자, 남편이 있던 여자까지도 범하기도 한다. 매사냥도 즐겼던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태종은 이런 양녕을 폐위할 것을 결정하는데 이때 황희는 이를 강력하게 만류한다. 하지만 태종은 이를 황희가 민무구형제(양녕의 외가친척들로 태종의 그들의 세력이 너무 커짐을 염려하고 제거한 인물들)의 제거에 크게 기여했으므로 나중에 양녕이 왕이 되었을 때 미움을 받을 것을 염려한다고 이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태종은 황희를 서인으로 격하시켰다. 하지만 태종은 황희를 여전히 각별하게 생각하여 여러 신하들이 황희를 벌주라고 청할 때에도 듣지 아니하다가 그래도 신하들이 계속 요구하자 마지못해 유배를 보내면서 노모를 모실 수 있게 배려하고 사헌부에서 압속을 하지 말게 하는 등 황희를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세종이 황희를 조정으로 부른 것은 1422년 10월로 그에게 내린 첫 벼슬은 정2품 의정부 참찬이었다. 세종은 황희를 참찬 직에 7개월 정도 머물게 하면서 조정에 적응시킨 뒤 1423년 5월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곧 그를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했다. 당시 조선 전역이 극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특히 강원도가 가장 심각했다. 강원도에 도착한 황희는 그곳 상황을 점검하고 구휼책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잘못을 한 관리를 벌하였다. 또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강원도의 기근 사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세종은 황희를 조정으로 불려들여 종1품 찬성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1431년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황희에게도 두 가지의 큰 스캔들이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황희는 청렴 결백한 선비로 알고 있었는데 이 스캔들중 하나는 살인사건 은폐이고 하나는 뇌물사건인 것에 대해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첫번째 스캔들인 살인사건 은폐에 대해서 살펴보면 황희의 사위인 서달이 모친과 함께 어디를 가는 길에 그 고을 아전이 서달에게 예를 갖추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화가 난 서달은 아전을 벌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아전이 죽었다. 당시 황희는 의정부 참찬이었는데 이 사건을 잘 무마하기 위해 친분이 깊던 맹사성을 찾아가 피해자 집안과 중재를 요청했다. 맹사성은 죽은 아전의 형을 불러 약간은 협박성 있게 가해자 집안과 잘 화해하라고 권고한다. 맹사성은 신창현감 곽규에게 편지를 보내 어떻게 해서든 잘 처리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과정에서 죽은 아전의 형에게 뇌물을 주는 등 여러 가지 부적절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세상에 밝혀져 의금부에 갇히기도 한다. 또 1428년에는 첨절제사 박유가 황희에게 뇌물을 보내다가 걸린 일이 있었다. 이 두가지 큰 스캔들 이외에도 처남들인 양수와 양치가 위법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자 ,그들은 잘못이 없고 단지 풍문일 뿐이라는 글을 세종에게 올려 구차한 변명으로 청남들을 구해낸 적도 있고 관청에서 몰수한 과전을 아들 황치신에게 돌려주려고 사사로이 글을 올려 임금에게 청한 적도 있고 서자로 삼은 황중생이 잘못을 범하자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을 ‘조’씨로 바꾸게 한다.
황희의 이런 스캔들의 일부분은 황희의 성격 자체가 너무나 ‘착해서’ 발생하였다고 생각 할 수 있다. 황희의 여러 일화들은 황희가 얼마나 유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말해준다. 어린아이들이 울부짖고 떼를 쓰거나 말을 함부로 하여도 좀체 꾸짖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 수엽을 잡고 뺨을 때리는 아이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황희가 붓으로 글씨를 쓰려고 하자 여종의 아이가 종이 위에 오줌을 쌌다. 하지만 황희는 전혀 노여워하지 않고 오줌을 훔쳤다고 한다. 또 손님이 와서 상이 차려지면 그 집종들의 자식들이 불이 나게 달려와 마구 집어 먹기도 하였다. 같이 있던 손님들이 대체 왜 말리지 않는냐고 물을 때 황희는 “노비도 역시 하늘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황희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런 황희의 유순한 성격이 여러 스캔들에 휩쓸게 된 원인이 아니였나 싶다.
세종도 황희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황희의 이런 잘못보다는 정사에 있어서의 그의 능력을 높게 샀고 다른 대신들의 잘못과 비교하여 황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다른 신하에 비해 청렴하게 산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안숭선과 세종의 대화를 끝으로 황희 부분을 마치려고 한다.
안숭선이 대답하였다.
“교화와 석균의 일은 진정 황희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정사를 의논하는데 있어서 황희만큼 깊은 계책과 원대한 생각을 내놓는 사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