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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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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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8~19세기 서구에서 산업화의 진전에 따른 사회모순의 심화로 사회주의가 대두하였다. 하지만 1900년대까지 한국인들의 사회주의 수용은 개인 차원에 그쳤다. 그러나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민족적 과제가 주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국인들은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어갈 새로운 이념을 모색하였고, 그 이념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는 사고체계여야 했다. 이러한 반제국주의적 사고체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반자본주의사상인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한국인들의 사회주의 수용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 러시아혁명 등을 계기로 촉진되었다. 한국인들도 약육강식·적자생존의 원칙이 제1차 세계대전의 대참사를 초래한 것으로 파악하고, 힘의 논리인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을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회개조·세계개조론을 수용하였는데, 그 중의 한 조류가 사회주의였다.
1919년의 3·1운동은 한국인의 사회주의 수용을 확산시켰다. 민중해방을 부르짖던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사회주의는 한국인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한국인의 사회주의 수용은 ‘춘추대의’를 내세운 명분론, 대동사상 및 사회개조·세계개조론 등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이때 아나키즘이 그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로 상호부조론을 수용하였고, 상호부조론은 아나코코뮤니즘의 주요한 이론이었다. 둘째, 당시 한국인들이 사회주의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획득한 곳이 일본과 중국이었고, 일본과 중국에서는 1905~1920년까지 아나키즘이 지식인의 저항운동 속에서 가장 활력에 찬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1880년대부터 소개된 사회주의의 내용은 테러 등 아나키즘과 관련된 것이 다수를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국내
한국인들에게 사회주의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한성순보』를 통해서였다. 유럽의 사회당과 러시아의 허무당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리고 1870년대에 이미 국내에 유입되고 있었던 중국의 『만국공보』나 양계초의 저술 등을 통해서도 국내에 전해졌다. 또한 일본에서 발행되던 신문·잡지·서적 등이나 일본 유학생, 한국에 있던 일본 사회주의자 등을 통해서 아나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가 1900년대 무렵부터 국내에 전파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의 테러활동이나 테러예찬론 등은 당시 의병전쟁에서 패배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한국인들에게 국권회복운동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해주었다. 19세기 말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암살행위의 상당 부분은 테러를 주요한 선전수단으로 삼는 아나키스트들의 방법론을 채용한 이들에 의해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이 아나키즘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국망을 전후한 시기부터였고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에서 붉은 혁명기를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사회주의를 선전한 ‘붉은 혁명기 사건’, 이원군만세시위에서 적기가 등장한 ‘적기사건’ 등이 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에는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는 활동가까지 나타나는 등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노동자단체는 1920년에 조선노동공제회를 비롯하여 33개가 결성되었으며 조선노동공제회는 최초의 전국적 노동자조직으로서 고순흠·나경석 등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의식을 해결하는 동시에, 애정으로써 호상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공동의 번영을 꾀”하는 것을 주지로 삼았다. 이는 생존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아나키즘을 말해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각종 활동을 전개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기관지 『공제』를 발행하여 사회주의 특히 아나키즘적 사고에 입각한 계몽·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입장에서 사회를 분석하고 사회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을 중시하거나, 지식인이나 전위조직에 의한 지도를 부정하고 민중의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등 아나키즘에 입각한 제 주장을 개진하였다.